샘 월턴(1918~1992)
샘 월턴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젊은 시절부터 유통과 판매를 배우고 이를 자신의 사업에 적용해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엄청난 재산을 쌓고서도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빨간 픽업트럭을 타고 다니고 권위적이지 않았다.
한 해 이익이 8% 이상 오르면 월스트리트에서 훌라댄스를 추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이익이 그만큼 올라버려서 진짜로 춤을 추었다. (유튜브에 동영상으로 박제되었다.)
그는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다기보다는,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들부터 개선해나갔고 그 결과 점점 성장해나갔다.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경쟁이 치열한 유통업계에서 독보적인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차례
1. 모범생 샘 월턴(월마트 이전의 샘 월턴)
2. 꿈꿨던 대형 할인점 오픈(월마트 창업스토리)
3. 월마트의 성공요인
모범생 샘 월턴(월마트 이전의 샘 월턴)
어린 시절
샘 월턴은 거래 중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릴 때부터 협상을 배웠다.
1929년, 11살이 되던 해에 경제대공황이 터졌다.
아버지는 형이 운영하던 저당회사에서 일했는데, 땅을 압류하는 일을 맡으면서 주민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집 앞에 계란이 던져질 정도였다.
월턴은 10대 때부터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부지런히 하며 돈을 벌었다.
신문배달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알바를 너무 많이 하는것이 아니냐며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걱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학생회장 자리도 맡았으며, 웅변클럽 활동도 열심히 했다. 운동 실력도 뛰어나 프로 선수 제의를 받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미주리 대학교(미국 주립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4학년때 그는 남학생 명예 학회의 학회장/미식축구클럽 회장/ROTC(군대 장교 양성과정)대표를 맡았다. 성적이 좋았기에 대학원 진학도 고려했으나, 돈이 부족해서 접었다.
졸업 후
샘 월턴은 대학 졸업 후 마트 체인인 J.C. 페니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판매와 장부 정리, 전표 작성, 상품 진열, 청소까지 매장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일을 배우며 소매업의 기본기를 익혔다. 또한 경쟁 상점을 꼼꼼히 분석하며 장사 수완을 키워갔다.
그러나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징집 영장이 나오면서 군에 입대해야 했다.
군 복무 중 그는 한 여성을 만나 결혼했는데, 그녀는 매우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2년간의 군 생활 동안 월턴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제대 후 시작할 사업 계획을 꼼꼼히 세우며 준비했다.
전역한 나이는 27세. 장인어른이 사업자금을 대주겠다고 했지만, 월턴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보고 싶다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첫 상점
샘 월턴은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마켓 체인점인 ‘벤 프랭클린’ 뉴포드점을 인수했다. (현재 한국으로 따지면 CU나 GS25 편의점을 연 것이다.)
하지만 가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전 사장의 방만한 경영으로 단골손님도 거의 없었고, 지역에서는 이미 ‘스털링 스토어’가 가장 잘나가는 마켓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월턴은 먼저 교회와 지역 모임에 나가며 주민들과 친해졌고, 경쟁 상점도 분석했다. 또 동네의 특성 (노인들이 많고, 그들은 주로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다)을 파악해 상품을 진열했다.
당시 벤 프랭클린 점주들은 본사가 지정한 도매상 ‘버틀러 브라더스’에서만 물건을 사야 했다.
그러나 월턴은 더 저렴한 공급처를 찾아 단가를 낮췄고, 본사의 지침과 다른 방식으로 할인 판매를 시도했다.
본사에서 제지하려 했지만, 월턴은 이렇게 설득했다.
“제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실패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성공한 방법만 본사가 가져간다면, 결국 본사에도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혁신적인 접근은 성공적이었다. 월턴의 점포는 빠르게 성장해 지역 매출 1위가 되었고, 3년 만에 스털링 스토어를 제쳤다.
인수 전 연매출: 7만 달러
1년 차: 10만 달러
2년 차: 14만 달러
3년 차: 17만 달러
그러나 5년 계약이 끝나자 문제가 생겼다. 점포 임차인이 자기 아들에게 가게를 주고 싶다며,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월턴은 큰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32세에 첫 사업을 접어야 했다.
새로운 상점
월턴은 첫 가게를 잃은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아칸소주 밴톤빌이라는 시골 도시에 새로운 벤 프랭클린 상점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려 99년 임차 계약을 맺었다.
또 당시 전국 벤 프랭클린 점포 중 세 번째로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했다. 직원이 물건을 꺼내 보여주던 기존 방식과 달리 고객이 직접 골라 계산대로 가져가는 형태였다.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사람들도 재미있어했다.
여성 속옷이 비싸고 구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속옷을 대량 할인 판매했다. 이는 여성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큰 효과를 냈다.
사업은 점차 번창했고, 그는 34세에 이웃 도시에 두 번째 지점을 개업할 수 있었다.
그 무렵 훌라후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에서는 주문량이 폭주해 소규모 상인들의 발주를 받지 않았다.
이에 월턴은 호스를 파는 사람과 함께 밤새 훌라후프를 만들어 판매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주변에 들어선 대형 쇼핑센터에도 벤 프랭클린 지점을 분양받아 입지를 넓혀갔다.
월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아둔 돈을 투자해 대형 할인점을 직접 건설했다.
그러나 1957년, 갑작스러운 토네이도가 들이닥쳐 건물이 날아가버렸다.
채권자들의 독촉이 이어지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돌며 다시 할인점을 지을 곳을 찾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42세였고, 이미 미국 최대 규모의 상점 운영자였다.
꿈꿨던 대형 할인점 오픈(월마트 창업스토리)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월턴의 사업 성장은 잠시 멈추는 듯했다.
그는 한계를 느끼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며 상점들을 연구했다. 특히 공장 직영 도소매점과 대형 할인점의 장단점을 비교하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모색했다.
그리고 1962년, 44세의 나이에 월마트 1호점을 개관했다.
‘매장에 숨겨진 TV 찾기’ 같은 독특한 이벤트를 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철제 선반을 사용하고 실내 장식을 최소화해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팔았다. 그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월턴은 12개의 월마트와 15개의 벤 프랭클린 지점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성장했다.
월마트 매장의 규모도 1천 제곱미터에서 1만 제곱미터로 늘었다. 월턴은 컴퓨터 전산을 도입하고 물류창고를 건설해서 운송비도 낮추었다.
1970년, 월마트는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
그래도 월턴은 여전히 검소하게 살았다. 작은 사무실에서 일했고 허름한 옷차림에 빨간 포드 픽업트럭을 타고 다녔다.
월마트는 30년 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월턴은 1992년,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고 같은 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월마트 성공요인
1. 시장 선택
다른 대형 마트들이 주로 대도시에 집중하는 동안, 월턴은 인구 5만 명 이하의 소도시를 공략했다.
대형 할인점들이 무시하던 시장은 진입장벽이 낮고 경쟁이 거의 없었으며, 이는 월마트가 날개를 달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2. 다양한 시도
월턴은 남들이 아무생각 없이 일할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하며 최선을 다했다.
벤프랭클린 상점을 운영할 때부터 손님을 끌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이것저것 시도했다.
또 여러 이벤트를 열어서, 마트를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공간이 아닌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었다.
3. 고객이 왕이다
월마트는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고객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언제나 고객을 중심에 두고 서비스와 가격 전략을 설계함으로써,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출처: 자서전 <월마트, 두려움 없는 도전>, Who? 샘 월튼, 중부매일뉴스(https://www.jbnews.com), 사진출처 챗지피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