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인사
안녕하세요.
비주류VC입니다.
스타트업 투자를 11년째 하고 있습니다.
저는 EO Planet에 글을 기고하시는 멋진 VC님들과는 조금 다른 글들을 쓸 것 같아요.
완벽한 자료분석과 센스있게 해외 자료들을 가져와 보기 좋게 편집해서 보여주시는 멋진 분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게, 제 자신이 겪은 일을 그냥 힘 빼고 허심탄회하게 쓰게 될 것 같아요.
일종의 혼잣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즐겁게 읽어주시면 더 써보도록 할게요.
여기 2015년 1월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VC로써 스타트업 투자업무를 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도 처음부터 냉소적인 사람은 아니었어요.
투자에 있어서도 사람 냄새가 나고, 창업가와의 인간적인 소통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보고 투자를 하고 싶어했던 한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10년간 이 생활을 하다보니 사람이 매우 냉소적으로 변해버렸어요.
제 생각에는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그래요.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오늘은 제가 VC를 하면서 변하게 된 과정을 아주 짧은 에피소드로 들려드릴게요.
증권사에서 VC로 이직
증권사 IBD(Investment Banking Division)에서 주로 펀드레이징과 M&A 업무를 했었어요.
IBD는 모두 아시다시피 투자은행 업무를 뜻하는데, 전통적인 은행의 여수신 업무가 아닌 투자와 관련된 모든 일을 다루는 부서라고 보시면 되요.
총 2년간 근무를 했었는데 초반에는 주로 일반 기업에 대한 펀드레이징을 했었고 퇴사하기 6개월 전부터는 부동산 PF 자금조달 업무를 주로 했었어요.
대부분 데이터 위주로 자료가 만들어져요.
보기만 해도 재미가 1도 없는 그냥 엑셀로 이루어진 표들만 주루룩 나열되는 식이에요.
특히나 부동산 PF는 데이터의 대부분이 “돈”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떤 사업장이 있고, 주변에 어떤 건물이 있는데, 이 사업장에 뭘 다 짓고보니까 주변 건물 중 어느 건물과 비슷한 시세가 될 것만 같은 느낌같은 느낌이 있더라~~ 라는 내용으로 주로 마무리가 되요.
그리고 이 사업장을 돌리려면 얼마가 필요한데, 건설사가 책임준공을 해주고 있고 그로 인해 얼마의 자금만 더 있으면 그럴듯한 건물을 올려서 분양해서 얼마를 받을 수 있어요!!! 라는 논리로 자료가 만들어져요.
이런 자료를 주로 다루다보니 사람이 참 단순해져요.
숫자만 가지고 자료를 만드니까 정성적인 부분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에요.
사업장을 관리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 필요없고,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시행사 대표에 대한 마인드는 더더욱 관심도 없으며,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에 대한 이해도도 전혀 필요 없어요.
그리고 이런 자료만 다루는 사람의 성격이 계속해서 팍팍해지는 면도 있고, 대부분의 업무가 “영업”에 치우쳐져 있어요.
“영업”은 술로 이루어져요.
대출을 해줄 수 있는 기관이나 회사의 담당자분들을 모시고 술을 계속 마셔요.
부동산 PF업무를 오래 한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재미”는 정말 없었어요.
콘텐츠 투자를 통한 인간성의 변화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VC로 이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몸담게 된 VC는 문화콘텐츠 펀드를 주로 운용하고 있었고 AUM이 200억대로 아직은 작았기 때문에 이래저래 저에게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오히려 너무 대형사였다면 애시당초 이직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간다 해도 고유의 투자분야가 없는 이상 DDD(돈되는 거 다)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앞서 설명드렸던 건조한 투자건만 다루다가 갑자기 재미있는 “콘텐츠”를 다루게 된다고 하니 상당히 기대가 됬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처음 다루게 된 투자건이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였어요.
처음에는 자료들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부동산 PF 자료만 보다가 애니메이션 PF 자료를 보니까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았어요.
내가 이 산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서 이해를 못한다고 처음에는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25편짜리 EBS에서 보게 될 애니메이션의 제작비가 25억 정도 된다고 해요.
어…25억…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건가…? 싶었죠.
그런데 회사를 방문해보니 일견 이해가 됬어요.
일단 3D프로그램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게 정말….지금도 비슷하지만 그 당시에도 완전 쌩 노가다였어요.
거의 직원들을 가둬놓고 그래픽을 한땀한땀 그리는 수준이었어서 인건비가 만만치않게 투입되는 거였죠.
그렇게 애니메이션 투자를 몇 건 실행하면서 뭔가 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어요.
바로 투자 대비 회수에 대한 경험을 처음 해보게 된 것이지요.
제가 간혹 말하는 문장이 있어요.
“어떤 산업을 이해하고 싶으면 돈을 넣어봐라. 그보다 빠른 방법은 없다.”
애니메이션을 EBS에 방영하면 편당 많아봐야 약 500만원 정도 줘요.
물론 상황에 따라서 1천만원 까지도 준다는데, 제가 투자한 건 중에서는 본 적이 없어요.
백번 양보해서 편당 1천만원이면 25편이니까 2억 5천만원 회수가 되는거에요.
그런데 제작비는 25억원 이잖아요?
그럼 나머지 22억 5천만원은 어떻게 회수를 해야 할까요???
맞아요.
완구나 굿즈를 팔아서 회수를 해야되요.
그런데 완구회사에 가보니까 얘기가 완전 다르더라구요.
완구회사가 제시하는건 판매가의 8%만 정산해 주겠다는 거에요. 홀리 ㅆ…
100억원 어치 완구가 팔리면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8억원을 회수하는 거에요.
22억 5천만원을 회수하려면 281억원 어치의 완구를 팔아 제껴야 되는거에요!!
281억원 어치 완구 판매가 가능하지 않냐구요?
위의 표는 국내 대표적인 완구 회사인 “아카데미과학”의 매출액 추이에요.
2022년 최고치였을 때 총 매출액이 402억원이에요.
한개의 IP로만 판매한게 아니고 수십개의 IP를 기반으로 한 완구를 팔아서 나온 실적이겠죠???
그런데 지금 저희는 세상에 처음 나온 애니메이션의 완구 하나로 281억원 어치의 완구를 팔아야해요.
산술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그래서 결국은 회수가 많이 되지 못하고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일반인들은 이런 투자/회수 구조를 알기가 어려워요.
전문 투자자들의 경우에도 이런 구조는 사실 알기 어렵죠.
그래서 “문화콘텐츠투자심사역(문콘심사역)”이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해요.
더 문제가 된 것은, 제가 2016년~2018년에 겪었던 투자 건들의 제작비는 25억원이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60억원까지 늘어났었어요.
인건비가 상승된 것도 있고 정부에서 애니메이션 산업 육성에 드라이브를 걸다보니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렸어요.
지금의 드라마 제작비가 수직상승한 것보다 더 빠르게 선행해서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상승했던 거에요.
그럼 완구를 더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예상하셨다시피 그렇게 되진 않았죠.
당연히 애니메이션 제작에 진심인 제작자 분들이셨고,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과 전문성이 모두 뛰어나셨던 분들과 만나게 되어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돈을 버는 관점에서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었고, 돈을 잃으면 사업 지속이 어려워지는 VC 특성상 좋지 않은 경험이었던 건 맞아요.
현재는 제작사들이 현실성 있게 제작비를 많이들 줄였고, 실제로 방영→판매→회수가 이루어지는 케이스도 종종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자정작용이 되고 있는 것인데 제가 어쩌면 산업 형성 초반에 태풍 한가운데 있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좌우지간 이 시점부터 제가 태도가 좀 변한것 같아요.
애니메이션 트레일러만 보고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빨리 투자를 하고 싶어하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제작사 대표님들께 회수 방안을 꼬치꼬치 물어보고 있더라구요.
저도 모르게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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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