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마이프차 팀에 모처럼 좋은 소식을 공유했다. 영업팀에서 작년부터 추진해온 모 대기업과 데이터 공급 계약이 최종 확정된 것이다. B2B 사업에서 엔터프라이즈급 고객사 확보는 성장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엔터프라이즈 고객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제품 도입에 보수적이다.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을 교체하거나 신규 제품을 사내 업무 프로세스에 반영하는 과정 자체가 큰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제품의 효용이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는한 구매하지 않는다. 특히 제품의 개발사가 스타트업이라면 회사의 지속성을 신중히 따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개발사가 지속하지 못하면 다시 대체제를 도입해야 하고 그에 따른 기회비용도 대폭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기업이 특정 스타트업의 제품을 도입한다는 것은 해당 제품의 성능, 효과와 함께 회사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도를 검증했다는 의미다. 보통의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의 사업 문의에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섣불리 샴페인을 터뜨려서는 안된다. 사업 논의와 최종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에 제품을 공급할 때 기억해야 할 사항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봤다.
1.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은 속도가 생명인 반면 대기업은 리스크 헷지(Risk hedge)가 속도 이상으로 중요하다. 규모가 크고 오래된 기업일수록 느리지만 안전한 결정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최초 논의 이후 클로징까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은 대기업의 편일 때가 많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협의에 임해야 한다. 서두에 언급한 마이프차 팀의 데이터 공급 건도 최초 미팅 이후 1년 2개월이 걸렸다. 언제든지 협의 과정이 보류되거나 무산될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2.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를 파악해야 한다.
실무 부서와 구매 부서 간 의사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top-down 세일즈와 bottom-up 세일즈를 병행해야 한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일수록 창업자가 핵심 의사결정권자에 대한 세일즈에 함께뛰는 것이 좋다. 창업자가 곧 회사에 대한 신뢰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마이프차 팀에서도 중요한 고객에 대해서는 영업 리더와 내가 호흡을 맞추며 대응하고 있다. 협업 상대가 되는 부서 뿐만 아니라 유관 부서가 어디인지, 구매 부서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실무 부서와 공급 가격에 대해 협의를 이뤘다 해도 구매 부서에서 추가 협상을 요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늘 논의중인 실무자가 내일 타 부서로 이동하는 경우도 많다. 상대 조직을 입체적으로 파악할수록 여러가지 돌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
3.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오픈하지 말자.
권투에서 잽과 카운터 펀치를 적절히 날리는 것이 중요하다. 잽만 날려서는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고, 카운터 펀치만 날리다가는 내가 먼저 쓰러진다. 고객사와 처음 미팅을 시작하며 이후 협의를 전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첫 미팅부터 비장의 무기를 꺼내며 모든 것을 오픈하면 오히려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면서 내가 가진 솔루션의 매력을 적절히 어필하는 것이 좋다. ‘적절히’란 사실 ‘촉’의 영역이기도 해서 경험이 축적되면 더 잘 할 수 있다. 물론 첫 미팅에 고객사의 의사결정권자가 참여할 경우는 핵심을 바로 제시하며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4. 딜의 목표에 따라 대응 전략을 달리해야 한다.
지금 논의 중인 잠재 고객사는 우리 제품의 중요 레퍼런스를 확보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고객사가 추가되는 것인지에 따라 제안의 강도가 달라질 것이다. 또는 전략적 투자 유치 또는 M&A 후보로 생각하는 곳인지, 아니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고객으로 바라볼 것인지 사전에 스탠스를 정해야 한다. 대기업은 검토 중인 제품에 대한 만족도가 클수록 전략적 투자 또는 인수를 고려할 때가 있다. 동시에 상호 독점적인 관계를 제안하기도 한다. 스타트업이 이런 제안을 받는 것 자체는 매우 긍정적이지만, 또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전략적 투자를 받을 경우 그 고객과 경쟁 관계에 있는 잠재 고객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상호 독점 관계는 안정적이지만 그만큼 확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 역으로 해당 제품 영역에서 스타트업의 기술이나 경쟁력이 확실한 우위에 있을 경우 상호 경쟁 관계에 있는 고객 모두로부터 투자를 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므로 깊게 고민해야 한다.
5. 계약서를 꼼꼼히 보되 리스크 제로는 불가능하다.
고객사와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계약 단계에 이를 때 대기업의 표준 계약서를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계약서란 태생적으로 초안(draft)을 설계한 측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스타트업은 대부분 사내에 법무팀이 없고, 외부 변호사로부터 자문을 받아야 하는데 비용이 발생하므로 법률 검토를 생략할 때가 많다. 창업자가 사업 경험이 많다면 어느 정도 직접 해석하며 대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가급적 법률 검토를 받아야 한다. 고객사의 표준 계약서라 하더라도 검토 결과에 따라 당당하게 수정을 요청해야 한다. 수정 불가능한 계약서는 없다. 한편으로 계약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모호한 영역이 남는다. 이 모호함은 곧 리스크가 된다. 대표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스타트업 단계에서는 일정 리스크를 감수하되 계약 체결을 통해 기대하는 이익을 빠르게 획득하는 길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6. 빠르게 대응하되 거짓말은 금물이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대기업은 스타트업의 제품을 도입할 때 필연적으로 회사의 신뢰도를 검증할 수밖에 없다. 검증 과정에서 크고 작은 요청과 다양한 질의 응답이 뒤따른다. 이때 신속함이 미덕이며 고객의 호감을 사는 지름길이다. 특정 시점의 요청이 계약의 결정적인 순간일 때가 있는데, 그 때를 사전에 예측할 수 없으므로 기본적으로 빠른 대응이 안전하다. 다만, 대응 과정에서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 지금 바로 가능한 것, 시간을 가지면 할 수 있는 것, 가능 여부를 아직 모르는 것, 마지막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해 명료하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록 신뢰를 얻는다.
7. 냉정한 비즈니스 관계임을 잊지 말자.
대기업은 사회적으로, 때로 법률적으로 상생을 요구 받는다. 대기업 입장에서 스타트업의 제품을 구매하고 협업하는 것이 브랜드 이미지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스타트업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의 호의에 기대지는 말자. 대기업이 호의를 베풀어 준다면야 감사하겠지만, 그 호의를 먼저 기대하거나 의존하려 해서는 자생력을 가질수 없다. 어떤 면에서 대기업 실무자들은 스타트업보다 더 큰 실적 압박을 받는다. 그들에게 어떤 실리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작더라도 주는 것이 분명할 때 거래가 지속될 수 있음을 기억 하자. 한편으로 대기업이 어느 순간 계약 논의를 중단하고, 해당 제품을 모방하여 출시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최근에는 스타트업도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피해 사실을 적극 알리며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내상이 클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협의하는 상대방이 언제든지 나의 경쟁사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접근하는 것이 현명하다.
스타트업이 만드는 제품이 극강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위에 기술한 내용을 모두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흔하지 않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에 제품을 공급할 때 우리 제품의 기술성과 차별성에만 매몰되서는 효과적으로 협상하기 어렵다. 대기업이 갖는 구조적인 환경을 이해해야 그들을 고객으로 만들수 있다.
대기업과 협업하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최종 성사될 경우 얻는 장점은 명확하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비교적 큰 매출 규모를 확보할 수 있고, 제품과 회사의 신뢰도를 높일수 있다. 이는 다시 고객 확대로 이어진다. 또한 대기업과 협업하며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굴하고 전략적 투자 유치로 연결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스타트업 내부 구성원에게 자신감을 준다. 아무쪼록 동시대에 B2B 사업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스타트업들이 국내/외 엔터프라이즈급 대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해가며 안정적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마이프차를 포함하여.